말의 아름다움/우리말

호수 관련 시(詩) 모음

제이 스치는 바람에 2021. 2. 13.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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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근처>

                    김영태

 

그대는 지금도

물빛이다

물빛으로 어디에

어리고 있고

내가 그 물 밑을 들여다보면

헌 영혼 하나가

가고 있다

그대의 무릎이 물에 잠긴

옆으로, 구겨진 수면 위에 나뭇잎같이

 


<그대 그리운가>

                      우영규

 

강릉 땅 경포호수에도

찬비가 내리는지

 

붉은색 듬뿍 바른

두근대는 맘 만지러 강원에 갔다가

청상(淸霜)이 내린 줄도 모르고 서 있었네

 

한걸음에 한 달씩 세월은 다 가고

창가를 스쳐가는 산자락에는

겨울 맞이하는 회 빛만 늘어졌네

 

너 두고 온 호숫가 자그만 벤치에도

낙엽은 뒹구는지

색 잃은 낙엽위에도 찬비가 내리는지

 

이 비는 왜 내려 가슴을 파고들고

그리움만 고이는 가슴에

어쩌라고 자꾸 긴 밤은 내리는지

 

강릉에도 비 내리는지

찬비 내리는지

 


<호수>

          이경임

 

돌팔매질을 당해봐야 영혼에 파문이 생기는 거죠

강아지를 키우거나 나무와 이야기하거나

꽃을 돌보는 건 쉽죠

아무도 만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는 것처럼 그런 것들은 평온해요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처럼

사람을 그리워해봐야 영혼에 파문이 생기는 거죠

사람 때문에 죽고 싶고 사람 때문에 살고 싶어봐야

영혼에 파문이 생기는 거죠

지렁이처럼 땅속을 기어 다녀봐야죠

몽유병 환자처럼 숲 속을 떠돌아다녀봐야죠

뒤집힌 풍뎅이처럼 무덤 속에서 버둥거리다

어둠 속 폭우처럼 울부짖어봐야죠

강가 대나무 잎새들이 휘청거리는 소리와 영안실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어봐야죠

연인의 침묵 속에서 미친 벌 떼처럼 웅웅거리는

신기루를 만져봐야죠

 

그래야 영혼에 파문이 생기는 거죠


 

<호수처럼 너를 품는다>

                                     남정림

 

내가 너를 품는 것은

네가 꽃 피울 것을

기대해서가 아니야.

 

불투명한 내 품을 믿고

발을 뻗은

너의 순수한 뿌리 때문이야.

 

넓은 바다로 흘러가고 싶었던

나의 꿈은 갇혔지만

네 곁에서 출렁이는 너의 틈새로

슬픔의 리듬은 증발했어.

 

아직 젖지 않은

푸른 심장을 보여다오

어린 나의 봉우리야

 

네 영혼의 수면에

평화의 파문을 일으키는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되기까지

호수처럼 너를 품는다.


<경포호수에서>

                            조연동

 

바람이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다

잔물결이 일어나 바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바람의 신발에 껌처럼 붙었다 떨어지는 물결 때문에

호수가 흔들리고 있었다

호숙가까지 따라간 물결이 그 이상 넘지는 못하고

칼을 빼든 갈대 줄기만 흔들어 보다가

다시 호수로 돌아오고 있었다

발목 젖은 바람만 자전거 한 대 밀며

나를 첨벙첨벙 밟고 지나간 바람 있었지

내가 멀리까지 따라갔던 바람 있었지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호숫가 갈대밭 어디쯤에서 헤어진 바람 있었지

누구에게나 출렁이는 호수가 있지


<호수>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고용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삶의 호수>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나의 삶은 잔잔한 호수와 같아요.

호숫가 마을에는 나의 아픔이 살며,

집 떠날 생각은 차마 못 하지요.

가끔씩 다가감과 도주의 마음이 떱니다,

그러면 억눌린 소망들은 호수위로

은빛 갈매기들처럼 날아갑니다.

 

그러다 모든 것이 다시 조용해집니다......

그대는 나의 삶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시나요,

그것을 벌써 이해하셨던가요?

아침바다에 철썩이는 파도에 밀리며

나의 삶은 조개가 되어 힙겹게

그대 영혼의 해안에 오르고 싶어합니다.


<호수>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밤의 호수>

                     조용미

 

밤의 호수는 숲과 나무와 둑을

정확하게 대칭으로 나눈다

불빛만은 더 길게 늘어 당기고 있다

자욱한 안개마저 반으로 분할한다

호수의 한가운데 있는 섬은

낮에는 얌전히 떠 있어 무슨 생각에 골몰한지

짐작할 수 없지만 밤엔

커다란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컴컴한 입을 벌리고 어딘가로 가려하고 있다

불빛을 뿌옇게 풀어놓고 밤안개는

다시 숲속을 파고든다

번개가 물속을 훓고 갈 때

오래전에 가라앉은 것들의 침묵이 잠시 솟구쳤으나

이내 고요해졌다

밤의 호수 곳곳에서 완벽한 세포분열이 일어난다

그 중앙의 경계는 호수면이다

호수가 만들어낸 기하학 무늬를 달빛이 오래 비추던 날이 있었다

밤의 호수에서 그림자는 몸이 되어버린다

 


<사월의 호수>

                        장지원

 

바람에

조금씩 흔들려도

사월의 호수는 여유롭다

은빛

금빛

보라색 갈기를 흔들며 잔잔히 다가오는 호수

간간이 깃털에 묻어오는

명료한 소리

사계를 흔들어 깨우는 새 소리

수채화 물감을 점점이 찍어

네 마음까지 흔들어

잔잔히 밀려오는 사월의 그리움

느낌인지

물음인지

사월이 남기고 가는 여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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